달콤했다.
처음 며칠은 그랬다.
유진이가 아침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학교 정문 옆에 서서 내가 오는 방향을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면 손을 흔들었다. 그게 나한테 하는 손짓이라는 걸 처음엔 두세 번 확인했다. 혹시 뒤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내 이름을 부른 게 맞는지.
맞았다.
"재이야, 여기."
유진이가 말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그렇게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온 것처럼. 나는 아직도 어색해서 죽겠는데 유진이는 그냥 당연한 것처럼 내 옆에 나란히 서서 교실까지 같이 걸어 올라갔다.
등이 땀이 났다. 10월인데도.
"어제 수학 과제 어떻게 됐어?"
유진이가 걸으면서 물었다.
나는 속으로 '수학 과제, 수학 과제, 수학 과제'를 반복했다.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확인하느라 질문을 처리하는 데 1초가 걸렸다.
"다, 다 했어."
"다 했어? 5번 어떻게 풀었어? 나 5번이 이상한 것 같아서."
"아, 5번은……."
나는 5번 풀이를 설명했다.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교실 복도를 걸으면서 수학 풀이를 설명하다 보니 어느 순간 긴장이 조금 풀렸다. 수학 얘기는 할 수 있었다. 수학은 감정이 없으니까.
교실에 들어갔다. 유진이가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나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서 책상 위에 손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꿈인가.
꿈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유진이가 내 자리로 왔다.
수아가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손을 잡아당기고 있었는데 유진이가 "나 오늘 재이랑 먹을게"라고 했다. 수아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봤다.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정확히 알았다.
저게 누구야.
유진이가 내 옆에 앉았다.
"뭐 먹을 거야?"
"……아무거나."
"오늘 돈가스잖아. 잘됐다, 나 돈가스 좋아하는데."
유진이가 자연스럽게 내 옆에서 식판을 들었다. 나는 좀비처럼 그 옆에서 줄을 섰다. 도현이가 멀리서 이 상황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도현이가 엄지를 들었다.
나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밥을 먹는 동안 유진이가 계속 말을 걸었다. 어제 TV에서 본 거라든가, 수아가 어제 한 황당한 얘기라든가, 이번 주말에 뭐 할 거냐든가. 나는 단답형으로 대답하면서 밥을 먹었다. 유진이는 그게 어색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내 짧은 대답에도 웃으면서 다음 얘기를 이어갔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유진이가 내 팔을 잡았다.
"우리 운동장 한 바퀴 돌까?"
그 손이 내 팔에 닿는 순간, 나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빨라서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에. 하나, 둘, 셋, 넷. 괜찮아. 괜찮다. 이건 그냥 팔이고 손이고 이게 닿는다고 죽지는 않는다.
"어, 어."
우리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유진이가 팔짱을 끼지는 않고 그냥 손가락 두 개로 내 소매 끝을 살짝 잡은 채로. 바람이 불었다. 낙엽이 날렸다. 10월 점심의 햇빛이 따뜻했다.
이게 현실이구나, 하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게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뻔했다.
화요일 방과 후였다.
"재이야, 같이 가자."
유진이가 교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메고 나갔다. 유진이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섰다.
"어디 가?"
"그냥 걷자. 어디든."
우리는 학교 앞 골목을 걸었다. 유진이가 편의점에서 따뜻한 음료 두 개를 사서 하나를 건넸다. 나는 무슨 맛인지도 확인 안 하고 받아서 마셨다. 코코아였다. 달았다.
"재이는 학교 끝나고 보통 뭐 해?"
"집에 가."
"바로?"
"응."
"심심하지 않아?"
나는 잠깐 생각했다. 심심한 게 뭔지 몰랐다. 집에 가면 숙제를 하고 밥을 먹고 씻고 자는 게 일상이었다. 그 일상이 심심한 건지 편한 건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뭐가 심심해. 그냥 사는 거지."
"나는 심심해. 수아가 학원 가면 특히."
유진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볼이 살짝 나를 향해 있었다.
"재이야, 나 심심하면 불러도 돼?"
"……어."
"진짜?"
"어, 그래."
유진이가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진짜 기쁜 것인지, 아니면 사교적인 웃음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아직은.
집에 돌아온 건 다섯 시가 넘어서였다. 어머니가 "오늘 왜 이렇게 늦어?"라고 물었다. 나는 "친구랑 잠깐 있었어"라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봤다.
"친구? 도현이?"
"……아니."
"그럼 누구?"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냥 같은 반 애."
어머니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방으로 올라가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가 자꾸 재생됐다. 유진이의 목소리, 소매 끝을 잡던 두 손가락, 코코아의 달콤한 맛. 너무 사소한 것들인데 자꾸 재생됐다.
이게 진짜구나.
잠이 들기 전에 그렇게 생각했다.
수요일이었다. 수아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재이 씨, 잠깐 얘기해도 돼요?"
우리가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수아는 평소에 말이 빠르고 직설적인 아이였는데, 지금은 조금 조심스러워 보였다.
"어."
"유진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 유진이가 이렇지 않거든요. 갑자기 이렇게 된 거잖아요. 며칠 사이에. 뭔가 알고 있어요?"
"아니."
수아가 나를 가만히 봤다.
"재이 씨가 좋다고 하는 건 알겠어요. 그게 나쁜 게 아닌 건 아는데. 근데 뭔가…… 유진이 눈빛이 좀 이상해요. 딱 잘라서 말하면."
이상하다.
나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제 운동장을 걸을 때, 어떤 남자애가 나한테 "재이야!" 하고 불렀다. 같은 반 남자애였는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렀다. 나는 그쪽을 봤다. 뭔가 물어보려고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유진이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재이야, 이쪽으로 가자."
그게 자연스러웠다. 너무 자연스럽게 나를 반대 방향으로 데려갔고, 그 남자애는 그냥 멀어졌다. 그 순간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주 잠깐.
근데 유진이가 내 옆에서 웃으며 걸으니까, 그냥 그 생각을 덮어버렸다.
"걱정하지 마."
나는 수아에게 말했다.
수아가 한 번 더 나를 봤다. 말하고 싶은 게 더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목요일 미술 시간이었다.
나는 짝꿍인 이서현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서현이는 미술을 좋아하는 애였고, 물감 쓰는 방법에 대해 짧게 설명해줬다. 나는 물감을 잘 못 다루는 편이었다. 서현이가 내 팔레트 옆에 자기 것을 나란히 놓고 "이렇게 섞으면 돼, 봐봐"라고 하며 시범을 보여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별 거 아닌, 그냥 고맙다는 표시의 웃음.
창가 세 번째 줄에서, 유진이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걸 인식하면서도 인식하지 않은 척했다.
쉬는 시간이 됐다. 나는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복도에서 서현이와 잠깐 마주쳤다. 서현이가 "아까 고마웠어" 하고 말했다. 나는 "아니야" 하고 대답했다. 그게 전부였다. 10초도 안 되는 대화였다.
그런데 5교시 시작 전에, 서현이가 자기 물감 통을 열다가 뚜껑이 날아가며 물감이 쏟아졌다.
파란색 물감이 서현이 교복 앞에 잔뜩 튀었다.
서현이가 "아"라는 소리를 냈다. 주변 아이들이 "어, 어떡해"라며 웅성거렸다. 선생님이 다가와 화장실에서 닦고 오라고 했다. 서현이가 울상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상황을 지켜봤다.
그리고 교실 앞쪽을 봤다.
유진이가 앞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조용히 앉아서 칠판을 보고 있었다. 물감 통 뚜껑을 만진 것도, 근처에 간 것도 아무도 못 봤을 거다.
나도 못 봤다.
근데 알 수 있었다.
위가 살짝 뒤집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금요일 방과 후였다.
청소 당번이 됐다. 나랑 유진이, 그리고 반 아이 두 명이 청소를 했다. 나는 빗자루를 들고 교실 뒤쪽을 쓸었다. 유진이는 칠판을 지웠다. 아이들 둘이 쓰레기통을 들고 복도로 나갔다.
둘이 남았다.
유진이가 칠판 지우개를 내려놓고 뒤를 돌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다 간 것 같은데."
유진이가 교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게 나가자는 말인 줄 알고 빗자루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딸깍.
문 잠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빗자루를 내려놓다가 멈췄다.
"유진아?"
유진이가 문에서 손을 떼고 나를 봤다. 웃고 있었다. 아까 청소할 때 웃던 것과 같은 얼굴인데, 뭔가 달랐다.
"조금만 더 있어."
"……뭐?"
"그냥 조금만. 아직 하교 시간 됐잖아. 급하게 가면 어디 가."
나는 잠긴 문을 봤다가 유진이를 봤다. 유진이가 교실 창가 쪽으로 걸어가더니 창틀에 기댔다. 석양이 유진이 쪽으로 들어왔다.
"오늘 서현이랑 뭐 얘기했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물감 쓰는 법."
"그거 왜 물어봤어."
"내가 물어본 게 아니고 서현이가 알려준 거야. 미술 시간에."
"왜 알려줬어."
"……그냥 친절해서 아닐까."
유진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재이야."
"응."
"다른 여자애들이랑 웃는 거 싫어."
방에 고요가 흘렀다. 나는 유진이를 봤다. 유진이는 여전히 창가에 기대어 있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근데 눈은 웃지 않았다.
"……그건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알아. 그냥 싫다는 거야."
말이 막혔다.
그 뒤로 우리는 30분 정도 그 교실에 있었다. 유진이가 문을 열어준 건 6시가 가까워서였다. 나는 집에 오면서 계속 그 30분을 생각했다. 뭔가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뭔가 이상한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여자애들이랑 웃는 거 싫어.
그 말이 자꾸 들렸다.
월요일이었다.
수아가 계단에서 굴러 팔이 부러졌다.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직접 들었다. 쿵, 하는 소리와 수아의 비명 소리. 사람들이 달려갔다. 나도 갔다. 수아가 2층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선생님들이 와서 보건실로 데려갔다. 수아가 울면서 "아파, 아파"라고 말했다.
나는 계단 위쪽을 봤다.
아무도 없었다.
오후에 수아가 병원에서 돌아왔다. 팔에 깁스를 했다. 수아가 나를 붙잡고 주변을 한 번 확인하더니 작게 말했다.
"재이 씨."
"응."
"나 밀렸어."
나는 말이 안 나왔다.
"누군지는 못 봤어. 근데 뒤에서 분명히 손이 닿은 게 느껴졌거든. 그래서 넘어진 거야. 발이 미끄러진 게 아니라."
"……."
"재이 씨는 알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아가 내 얼굴을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구나."
"수아야——"
"괜찮아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수아가 돌아갔다.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까부터 유진이가 내 옆에서 수아를 보고 있었다. 나는 유진이를 봤다.
유진이가 나를 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수아 많이 다쳤어?"
"……깁스 했어."
"그렇구나. 불쌍하다."
유진이가 진짜로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요일 밤이었다.
밤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유진.
나는 받았다.
"재이야, 자고 있었어?"
"아니."
"다행이다. 뭐 해?"
"그냥 있었어."
"나도 그냥 있어. 재이 목소리 듣고 싶어서."
목소리 듣고 싶어서. 나는 그 말을 한 번 더 처리했다. 보통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건가. 잘 모르겠다.
"재이는 지금 뭐 생각해?"
"별거 없어."
"나 생각 안 해?"
"……지금 통화 중이잖아."
"그 전엔?"
나는 잠시 망설였다.
"생각했어."
"진짜?"
"어."
전화기 너머에서 유진이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통화를 끊고 나서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메시지가 왔다.
재이야 자기 전에 나 생각해
재이는 내 꿈 꿀 것 같아
나는 재이 꿈 꿀 것 같아
재이야 다른 애들 생각하지 마
나만 봐
메시지가 계속 왔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읽다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멈췄다.
창문 너머에 사람이 있었다.
나는 2층이다.
창문을 열었다. 유진이가 창틀 밖에 서 있었다. 어떻게 올라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창문 아래는 바로 땅인데. 유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문 잠겨 있어서."
나는 유진이를 내려다봤다. 발 아래가 비어 있는데 유진이는 창틀을 손으로 잡고 거기 서 있었다. 표정은 평온했다. 전혀 무섭지 않은 것처럼.
"들어와."
나는 창문을 더 열었다. 유진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방에 유진이가 들어왔다.
나는 그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이상함을 정확히 처리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가 내 방을 둘러보다가 책상 위 사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여기가 재이 방이구나."
"……어."
"냄새가 재이 같아."
나는 그 말이 뭔 뜻인지 몰랐다.
유진이가 한 시간쯤 있다가 돌아갔다. 창문으로. 내가 말리려고 했지만 유진이는 그냥 창틀에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자, 재이야."
그리고 내려갔다.
나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러고는 침대에 앉아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한 건 확실히 알겠는데, 무서운 건지 설레는 건지 구분이 잘 안 됐다.
금요일이었다.
방과 후에 교사 건물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3층 계단 아래에 이지수가 쓰러져 있었다. 이지수는 내 반 여자애였다. 서현이 친구였다.
나는 사람들이 몰리는 걸 보고 다가갔다.
이지수는 의식이 없었다. 숨은 쉬고 있었다. 머리가 계단 모서리에 부딪힌 것 같았다. 선생님들이 달려와 119를 불렀다. 나중에 들으니 다행히 뇌진탕은 아니었지만 이지수는 결국 3층 계단에서 떨어진 거였다.
나는 계단 위를 봤다.
그리고 계단 위, 3층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을 봤다.
유진이었다.
유진이가 난간에 손을 얹고 아래를 보고 있었다. 이지수가 있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올려다보는 걸 인식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3층까지 올라갔다. 유진이가 거기 있었다.
"재이야."
유진이가 웃으며 말했다.
"무서웠어? 아래가."
나는 유진이를 봤다. 유진이를 봤다. 계단 아래의 이지수를, 119가 오는 소리를, 수아가 계단에서 밀렸다고 한 말을, 미술 시간에 서현이의 물감이 쏟아진 것을 다 떠올렸다.
그리고 유진이의 눈을 봤다.
유진이는 웃고 있었다.
"재이, 왜 그렇게 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진이가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재이가 그렇게 보면 나 좀 무서워."
그 말이 너무 뒤집혀 있어서 나는 뒤로 물러섰다. 유진이가 멈췄다. 잠깐 표정이 없어졌다. 그러다가 다시 웃었다.
"재이야, 이따 같이 가자."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발이 떨렸다. 손이 떨렸다. 3층에서 2층으로 내려오면서 이지수가 이 계단에서 떨어졌다는 걸 다시 생각했다. 이지수가 왜 여기서 떨어졌을까. 아무도 보지 못했다. 수아 때처럼.
집에 돌아와서 방문을 잠갔다.
침대 위에 올라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유진이한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재이야 오늘 왜 그렇게 갔어
섭섭한데
재이야
재이야 답해
자는 거야
나는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머릿속에 이지수의 쓰러진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유진이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모습이. 그리고 웃으며 손을 흔들던 모습이.
밤새 잠이 안 왔다.
토요일 새벽이었다.
잠이 들어야 했다. 신을 만나야 했다. 원래대로 되돌려야 했다. 더 이상 두고 보면 안 됐다. 이지수가 다쳤다. 수아가 다쳤다. 다음엔 누가 다칠지 모른다.
근데 잠이 오지 않았다.
이지수의 얼굴이 떠오르면 눈이 떠졌다. 유진이가 손을 흔들던 장면이 떠오르면 눈이 떠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아도 어둠 속에서 자꾸 뭔가가 보이는 것 같아서 다시 눈이 떠졌다.
서랍 속에 엄마가 가끔 먹는 수면제가 있었다.
나는 서랍을 열었다.
꺼내 들었다.
오래 봤다.
그리고 하나를 꺼내서 물과 함께 삼켰다.
머리가 무거워졌다. 천장이 흐려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어둠이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그것이 이미 거기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왔구나.
나는 그것을 올려다봤다. 처음 봤을 때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무서운 건 여전한데, 이 어둠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그냥 무뎌진 건지.
"원상복구해줘."
내가 말했다.
알겠다. 대신 다음을 골라야 한다.
"알아."
나는 잠시 생각했다.
7대 죄악. 탐식, 나태, 탐욕, 시기, 교만, 분노. 색욕은 이미 썼다.
뭘 골라야 덜 위험할까. 뭘 골라야 사람이 안 다칠까.
한 명이 갔다.
그것이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이지수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병원에 실려 가는 이지수를. 이지수는 살았다. 다음엔 살지 않을 수도 있다.
"탐식."
나는 말했다.
먹는 거니까. 식탐이 생기는 거니까. 그게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건지 나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색욕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냥 밥을 많이 먹는 거 아닌가.
알겠다.
그것이 말했다.
조심해라.
어둠이 사라졌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이지수가 학교에 나왔다. 멀쩡했다. 붕대도 없고 타박상도 없었다. 이지수가 서현이와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복도에서 보다가 이지수가 분명히 쓰러졌는데, 라고 생각했다. 근데 멀쩡했다.
원상복구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아도 깁스를 안 하고 있었다.
유진이는 교실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손을 흔들었다. 평범한,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는 내 자리에 앉았다.
창밖을 봤다. 10월 하늘이 맑았다.
손이 떨렸다. 나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꾹 눌렀다.
다음엔 탐식이다.
탐식이라는 게 뭔지, 나는 아직도 정확히 몰랐다. 근데 괜찮겠지. 그냥 밥 많이 먹는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