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우화 · 첫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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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소원이 어떻게 파국이 되는가
마지막 소원 · 프롤로그
PROLOGUE
나는 오늘도 말을 걸지 못했다.
매일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은 해보자고. 오늘은 그냥 날씨 얘기라도 꺼내보자고. 근데 막상 그 애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입이 닫힌다.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는다. 심장이 갑자기 너무 빠르게 뛰어서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고, 손가락 끝이 찌릿찌릿해진다. 그러면 그냥 고개를 숙이고, 모르는 척, 바닥만 본다. 항상 그래왔다.
나는 한재이다. 고등학교 2학년 7반. 키는 평균보다 살짝 작고, 얼굴은 딱히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그냥 있어도 없어도 모를 그런 얼굴이다. 담임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 내 이름에서 잠깐 멈칫한 적이 있다. 아마 내가 반에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을 거다.
그게 나다.
그 애 이름은 서유진이다.
같은 반이다. 창가 세 번째 줄, 앞에서 두 번째 자리. 나는 그 자리를 외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어느 순간 외워져 있었다. 머리 길이가 어깨보다 딱 세 손가락 정도 아래까지 내려온다는 것도. 날씨가 추울 때는 귀를 살짝 덮는 크림색 머플러를 하고 온다는 것도. 점심을 다 먹고 나면 교실 뒤쪽 창문 턱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는 버릇이 있다는 것도.
외우려고 한 게 아니다. 그냥 눈이 자꾸 그쪽으로 갔고, 반복되다 보니 저절로 새겨진 것들이다.
짝사랑이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짝사랑이라는 건 적어도 한 번쯤은 대화를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유진이와 제대로 말을 나눈 적이 없다. 1학기 때 체육 수업에서 팀이 같았을 때 "패스해"라는 말을 들은 것, 그게 전부다. 그것도 나한테 한 말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냥 허공을 향해 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목소리를 아직 기억한다.
10월 초였다.
수요일 아침, 나는 평소보다 20분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버스를 잘못 탄 덕분이었다.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창문 너머로 운동장이 보였고, 아침 공기가 차가워서 유리창에 희뿌연 김이 맺혀 있었다.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때 유진이가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 교실에 우리 둘밖에 없다는 걸 인식한 순간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말을 걸어야 하나. 말을 걸어야 하나. 말을 걸어야 하나.
유진이는 자기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더니 창문을 조금 열었다. 10월 아침의 찬 공기가 교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5분 뒤에 다른 애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5분이 사라졌다.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그 5분을 계속 돌려보았다. 뭐라고 했어야 했을까. "아침 일찍 왔네요"는 너무 이상하고. "어제 수학 숙제 했어요"는 갑자기 왜. 그냥 "안녕하세요"는 어떨까. 2학기 되도록 한 번도 말 안 하다가 갑자기 안녕하세요는 또 너무 어색하고.
나는 결국 그 5분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도현이는 내 유일한 친구다.
점심시간에 항상 같이 먹는다. 도현이가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내가 늦게 와서 앉는다. 항상 그렇다.
"야."
오늘도 도현이가 젓가락으로 내 팔뚝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 나는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서유진 쳐다보지 마."
"안 봤어."
"봤잖아 방금."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도현이가 혀를 차며 밥을 떴다.
"야, 진짜로 고백해봐. 이러다가 졸업하겠다."
"됐어."
"뭐가 됐어. 근데 사실 너 고백 못 할 거 알아. 그냥 하는 말이야."
"……."
"걔가 차더라도 지금이랑 별로 달라질 게 없잖아. 지금도 어차피 아무것도 아니니까."
도현이의 말은 항상 틀린 데가 없어서 반박하기가 어렵다. 나는 그냥 콩나물국을 한 숟갈 더 떴다.
급식실 반대편 테이블에서 유진이가 최수아와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수아가 뭔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지 유진이가 밥을 먹다가 잠깐 웃었다. 소리는 여기까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목요일 오후, 버스 정류장이었다.
나는 줄 뒤에 서 있었는데, 바로 앞에 유진이가 있다는 걸 버스가 오고 나서야 알았다. 세상에. 나는 그 자리에서 내릴까 생각했다. 그냥 다음 버스 타면 되지 않나. 근데 버스 문이 열렸고, 앞사람들이 밀려 올라갔고, 나도 그냥 올라탔다.
유진이는 버스 안쪽 좌석에 앉았다.
빈자리가 없어서 나는 유진이 옆 손잡이를 잡고 섰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진짜로 터지면 어떡하지. 이 좁은 버스 안에서 심장이 터지면 어떡하지.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하고, 숨을 되도록 천천히 쉬었다.
유진이는 이어폰을 꽂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나는 다섯 정거장을 그렇게 서 있었다. 유진이 내릴 정거장이 다가오자 유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팔 쪽으로 살짝 스쳐 지나갔다. 아마 유진이는 인식도 못 했을 거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면 기억도 안 할 거다.
나는 그 닿을 듯 닿지 않은 거리를 집에 오는 내내 생각했다.
밤 열한 시 반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방은 어두웠고, 창문 너머 가로등 불빛이 커튼 사이로 가늘게 들어오고 있었다. 엄마는 이미 잠들었다. 집이 조용했다.
눈을 감았다.
같이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그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게 아니었다. 사귀고 싶다거나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같이 급식 먹고, 같이 하교하고, 버스에서 나란히 앉아서 각자 핸드폰 보다가 하나가 웃으면 다른 하나가 "뭐야 왜 웃어"라고 물어보는, 그런 거. 그게 너무 당연한 것처럼 다들 하고 있는데, 나는 왜 그게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그냥 같이 다니면 참 좋겠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잠이 들었다.
어둠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꿈이 없는 어둠인 줄 알았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그 어둠. 근데 발바닥에 뭔가가 닿는 느낌이 났다. 바닥. 딱딱한 바닥이 있었다. 나는 눈을 떴다.
끝이 없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위도, 아래도, 옆도 전부. 빛이 전혀 없는데 이상하게 내 손이 보였다. 내 몸이 보였다. 어디서 빛이 오는 건지 알 수 없는데 나만 조금 밝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그리고 그것을 봤다.
처음엔 기둥인 줄 알았다. 너무 길고 가늘어서. 근데 기둥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움직이고 있었다. 걷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도 나지 않는데, 그냥 그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키가 컸다. 비정상적으로. 천장이 있다면 닿을 것 같은 높이. 팔이 길었다. 손가락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다리도 길었다. 몸통은 작은데 팔다리가 그 비율에 맞지 않게 길고 길었다. 얼굴은,
얼굴이 없었다.
희고 밋밋했다. 눈도 코도 입도 없이 그냥 하얀 면이었다. 근데 그것이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아는지 설명할 수 없는데, 그냥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도망치려 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꿈에서 도망치려 할 때처럼,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것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멈췄다.
나와 두세 걸음 거리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의 얼굴 어딘가에서, 혹은 공기 전체에서, 혹은 내 귀 바로 옆에서.
"소원이 있지."
목소리가 아니라 생각이 심어지는 것 같았다.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박히는 것 같은 느낌.
나는 대답을 못 했다.
"있지."
반복이었다.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뭐야. 당신 누구야."
"신이라고 불러도 좋다."
신이라는 말이 황당했다. 근데 이 상황에서 황당함을 느끼는 게 더 이상했다. 나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냥 그것을 올려다봤다.
"꿈이지?"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으면 그래도 좋다."
"네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아이와 같이 다니고 싶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게 정확히 내가 잠들기 전에 한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그대로 말로 되어 나오는 걸 듣자 등골이 오싹했다.
"……어떻게 알아."
"알고 있다."
긴 팔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손가락이 내 쪽으로 뻗어지지는 않았다. 그냥 공중에 들렸다.
"들어줄 수 있다. 네 소원을."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그 아이에게 씌워야 할 것이 있다. 7대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 하나를."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씌운다는 게 무슨 말이야."
"그대로다. 죄악이 그 아이를 잠식한다. 그 아이는 변한다."
"변하면 어떻게 되는데."
"죄악에 따라 다르다."
나는 그것의 얼굴 없는 얼굴을 보았다. 죄악. 7대 죄악. 교과서에서 본 적 있는 단어였다. 교만, 탐욕, 색욕, 시기, 탐식, 분노, 나태. 그게 사람에게 씌워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거절하면?"
"그냥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일도 오늘과 같을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내일도 오늘과 같다. 말을 못 걸고, 시선을 피하고, 버스에서 스치고, 집에 와서 혼자 천장 보고. 1년 뒤에도 그렇게 졸업하고. 도현이 말대로 아무것도 아닌 채로.
"7대 죄악 중 하나를 골라라."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죄악이 씌워진다고 해도, 그 애가 나를 좋아하게 된다면. 적어도 말은 걸 수 있게 된다면. 그냥 같이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면. 같이 버스를 탈 수 있게 된다면.
죄악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은 다 알고 있었다.
"색욕."
내가 말했다.
색욕은 사랑이랑 비슷한 거 아닌가.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 좋아하는 마음이 좀 세지는 것. 그게 나쁠 게 뭐가 있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겠다."
그것이 말했다.
"내일부터다."
그리고 어둠이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떴다. 꿈 때문인지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몸은 가벼웠다. 그냥 꿈이었겠지. 나는 세수를 하고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학교 정문에서였다.
"재이야."
나는 멈췄다.
그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서유진이 정문 옆에 서 있었다. 나를 보고 있었다.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응?"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유진이가 한 걸음 다가왔다.
"있잖아."
유진이가 말했다.
"나, 너 좋아해."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한다.
10월 중순의 차가운 아침 공기. 뒤에서 지나가던 학생들 몇 명이 잠깐 이쪽을 봤다가 시선을 돌렸다. 유진이의 볼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내 귀가 믿어지지 않아서 뭔가 오해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순간만큼은,
그냥 행복했다.
그게 얼마나 잘못된 시작인지, 아직은 몰랐다.
계속
"색욕"의 대가가 시작된다.
한재이의 첫 번째 거래.
뒤표지에서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다. 대신, 대가가 있다. 평범한 고등학생, 짝사랑, 그리고 얼굴 없는 신. 색욕·탐식·나태·탐욕·시기·교만·분노 — 일곱 개의 거래가 끝날 때마다 한재이의 세계에서 하나씩 사라졌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스스로에게 물어봐라. 나라면 거기서 멈췄을까, 아니면 일곱 번째까지 갔을까.